옛날옛날에 '빨간 토끼'라는 아기토끼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.

이 아기는 처음부터 빨간 토끼가 아니라 하얀 토끼였다.

하얀아기토끼 시절 할머니 댁에 놀러갔다 빨간 페인트 통에 빠져 빨간아기토끼가 되었다.

아기의 엄마아빠는 이 빨강을 지우고자 아기를 열심히 씻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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아기를 씻기며 수없이 오고갔을 말들이 들린다.

'이게 안 지워져서 우리아기 어째. 어쩌면 좋아. 이 비누는 지워질까? 가만히 좀 있어봐라.'

'다른 토끼가 뭐라고 하면 어쩌니. 넌 하얀토끼잖아. 너만 그렇게 튀면 좋겠어!'

'무슨소리! 엄마아빠는 널 꼭 하얗게 만들고 말거야. 이따 또 목욕하자.

이 비누가 정말 잘 지워진대. 엄마아빠가 어렵게 구한거야. 이건 지워질거야.'

아기토끼는 아침마다 세수를 해야 하고 저녁에 해야 하는 목욕이 싫지만 엄마아빠가 하라는대로 해야 한다.

아직 아기이기 때문이다. 빨갛게 된 자신과 엄마아빠의 걱정이 보태져 큰 일이 났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.

앗, 아니다. 어른토끼가 아닌 아기 토끼 아닌가. 이렇게 변한 자신이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.

엄마아빠가 저렇게 난리 치는 이유를 모를 수도 있겠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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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느 날 엄마는 감기에 걸린 할머니에게 심부름을 다녀오라며 이것저것 챙겨 들려보낸다.

길을 가던 빨간아기토끼는 온통 빨간 옷을 입은 한 여자아이를 만난다.

아이끼리는 더군다나 같은 색깔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. 빨간아기토끼는 오늘 처음 만난 여자아이가 '빨간모자'라는 걸 안다.

'그럼 넌 지금 먹을 것이 가득 든 바구니를 들고 네 할머니 댁에 가는 길이지?'

'토끼야,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니?'

'우리 집에 책이 딱 한 권 있는데 그게 바로 네 이야기가 쓰여 있는 책이야!

난 네가 정말 살아 있는 줄은 몰랐는데......'

딱 한 권 있던 집에 있던 책의 주인공이 빨간모자라니! 두고두고 보았던 책의 주인공이 아기 토끼 앞에 나타났다.

'진짜 빨간 모자'를 만난 것이다.

그림책 속 빨간아기토끼는 빨간 모자를 일으켜세운다. 내용도 그림도 평면이 입체가 된다.

웬일로 빨간모자네 집에도 딱 한 권의 책이 있었다. 그 책의 주인공은 바로 빨간아기토끼다!

빨간모자도 빨간아기토끼가 '진짜' 살아있을 줄 몰랐다. 이번에는 빨간모자가 일으켜세운다. 둘은 살아났다.

서로가 서로를 살렸다.

'응, 그게 바로 나야! 빨간모자야, 너도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구나!'

하지만 서로의 미래가 너무나 나쁘게 끝난다는 걸 알고 있는 두 빨강이는 각자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해 줄 수 없다.

이들은 알 수 있는 건 오직 한 가지. 너무나 나쁘게 끝난다는 거다.

'아아! 둘 다 끝이 나쁘다니! 빨간 모자야,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?'

'좋은 생각이 났어! 우리가 우리 이야기를 스스로 만드는 거야. 그래서 책 쓴 어른들을 놀라게 해 주자!'

이들을 쫓아가던 나는 '어른들'이라는 말에 놀라고 뜨끔해진다.

저 맑고 당찬 포부에 다리 힘이 풀린다. 들고 있던 액자를 내려놓고 우리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자는 짧고 분명한, 기발한 아이디어에 동참하고 싶다. 여기는 옛날옛날이 아니다. 내가 서 있는 지금이다.

이들은 자기들에게 일어날 아주 나쁜 운명을 서로에게 알려주고 고민한다. 그리고 결심한다.

둘다 스스로 나쁜 것들을 찾아내어 훨씬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로 말이다.

훨씬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 둘은 기쁘다. 소풍을 나와 자리를 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둘 만의 세리머니를 한다.